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별밤지기
들국화 - 천 상 병 - 산등성 외딴곳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눕는다 가을은 다시 올까? 올 테지! 너와 나 외로운 맘 순하게 겹칠 때
비 난 비가 좋다. 소나기도 이슬비도 아닌 이것저것 섞어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좋다. 강하게 약하게 그리고 오다 말다를 반복하며, 우산 챙겨가면 안 오고 그냥 가면 소나기 만나는 그런 것들이 즐겁다. 속옷까지 젖었는데 그래도 뭐가 더 젖을 게 있는지 외딴집 처마밑에서 소나기 그치기를 기다리는 풍경이 재미있다. 그리고 난 기차를 좋아한다. 비와 기차, 내게는 환상의 콤비다. 장맛비가 길어진다는 일기예보에 나는 청량리로 간다. 강릉행 기차표를 들고 긴 줄 맨 끄트머리에 서면서부터 마음은 들뜬다. 제천을 지나고 태백을 지나 동해안을 따라 달리는 기차의 차창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려주는 풍경은 가히 백미다. 지금은 통일호도 없어지고 경강선 개통으로 그때 그 낭만도 사라졌다.
혜화동 카페 - 혜림 - 조금은 어둡고 문은 무거운 그곳 그곳에 가네 혜화동 카페 황혼의 길목 샛길 돌아 작은 의자에 앉으면 달콤한 커피향 위로 반가운 친구처럼 오는, 재즈 입던 옷 그대로 주머니에 손 찌르고 할 말이 많은 듯 내게로 다가와 귀엣말 해주네, 재즈 한 무리 젊은 세대 내 곁에 앉아 까르르 까르르 숲속 참새떼처럼 웃네 나도 숲속 한 마리 새가 되네, 재즈
오라, 거짓 사랑아 - 문 정 희 - 꽃아, 너도 거짓말을 하는구나 어제 그 모습은 무엇이었지?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 붉은 입술과 향기 오늘은 모두 사라지고 없구나 꽃아, 그래도 또 오너라 거짓 사랑아
알밤 - 예람 - 늦가을 숨결에 농익은 젖무덤 날 세운 가시로 감추려 하지만 숨어 익은 욕정 더는 숨길 수 없어 신열 오른 가슴 들키고 마는 가을의 오르가즘
모란이 피기까지는 - 김 영 랑 -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.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.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니다.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. 찬란한 슬픔의 봄을
누나 - 고 증 식 - 밤늦도록 부엌방에 불빛 일렁이더니 새벽녘 첫차 타러 나온 내 손에 가만히 물 묻은 손 다가와 얹혔다 시댁 식구들 몰래 따라 나온 구겨진 지폐 몇 장